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일스 데이비스 (문단 편집) === 활동 재개와 말년 === 1979년 7월 쯤부터 콜럼비아 부사장이었던 조지 버틀러가 몇 달이고 계속 마일스를 찾아가 활동 재개를 간청했는데(사실 마일스는 자기 몸 추스르기도 힘든 상태였다), 버틀러의 [[근성]]에 결국 마음을 움직인 마일스는 1980년 봄에 새로운 녹음 세션을 갖기로 했다. 예전처럼 빌 에반스[* 색소폰 연주자로, 같은 이름의 피아니스트와는 동명이인이다.]나 로버트 어빙 3세를 비롯한 젊은 음악인들을 영입하고 녹음을 시도했지만, 몇 년 동안 자신을 막장에 내던졌던 탓에 트럼펫조차 제대로 불지 못할 정도로 컴백 준비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여차저차해서 1981년에 컴백 앨범 '혼을 든 남자(The Man with a Horn)'를 발매했지만, 예전처럼 앨범 전체를 관통하던 강한 직관과 집중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한 범작이라는 평가를 받는 데 그쳤다. 1981년 여름부터 가을까지 미국과 일본에서 처음으로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고, 이 때의 실황 녹음들로 제작된 '우리는 마일스를 원한다(We Want Miles)' 와 '마일스! 마일스! 마일스!(Miles! Miles! Miles!)' 두 라이브 앨범도 나왔다. 비록 그 동안의 공백으로 인한 연주력 저하와 노쇠함을 감추지는 못했지만, 예전처럼 관객들을 쌩까고 고개를 푹 숙이거나 아예 등을 돌리고 연주하던 [[슈게이징]] 스타일의 무대 매너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관객들과 농담도 주고받거나 직접 밴드를 소개하는 등 훨씬 청중 친화적인 뮤지션으로 변모했고, 음악도 예전처럼 자기 중심적이고 불안해 보이는 추상성보다는 소위 '퓨전' 이나 [[펑크(음악)|펑크]](Funk)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간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 때부터 [[당뇨병]]과 [[뇌졸중]]을 비롯한 만성 질환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특히나 예전에 오랫동안 했던 마약이 건강을 악화시킨 주범이었다.] 그래서 재활 훈련과 치료를 위해 [[한의학]]이나 [[미술]]에 매달리기도 했다. 뇌졸중에서 회복된 뒤에는 해마다 '스타 피플(Star People)' 과 '디코이(Decoy)', '너를 체포하겠어(You're Under Arrest)' 같은 앨범들을 발표했다(비록 예전의 것들 만큼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지 못했지만, 재즈의 거장이 건재함을 알리기에는 충분했다).[* 물론 마일스는 안 좋은 건강 상태 속에서도 계속 연주 활동을 이어갔지만, 동시에 [[마이클 잭슨]]이나 [[티나 터너]], [[신디 로퍼]](신디 로퍼의 노래 [[Time After Time(신디 로퍼)|Time After Time]]을 커버하기도 했는데, 이 노래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는지 여러 공연에서 연주했다.) 등 팝 가수들의 앨범에서 게스트로 연주하는 등 정통주의를 표방하는 재즈 뮤지션들에게는 이러저러하게 찍힐 만한 활동도 병행했다. 그리고 [[배우]]나 [[화가]], [[패션모델]] 활동까지 하는 등 재즈에서 점차 멀어지려는 듯한 행보 때문에 자신의 [[안티]]들로 하여금 신나게 깔 거리를 제공하는 상황이 조성되었다.] 1984년에는 주로 클래식 거장들만 받아온 [[덴마크]]의 대표적 음악상인 레오니 소닝 음악상을 재즈 뮤지션으로서는 처음으로 받게 되었고, 이 시상식을 위해 재즈 트럼페터 겸 작곡가 팔레 미켈보르그가 작곡한 대규모 모음곡 '오라(Aura)' 를 준비했다. 이 곡은 이듬해 초반에 콜럼비아에서 녹음되었고, 이것이 마일스가 콜럼비아와 작업한 마지막 앨범이 되었다. [* 콜럼비아는 여전히 마일스의 상업적 가치를 인정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뉴 트래디셔널 재즈를 표방하던 젊은 재즈맨들을 전속 아티스트로 끌어모으던 중이었으며, 이 와중에 ‘마일스가 재즈를 버리고 팝의 상업성에 눈이 멀었다.’고 끊임없이 디스를 걸어오던 같은 음반사 소속 신진 뮤지션인 트럼페터 [[윈튼 마샬리스]]가 마일스의 신경을 굉장히 거슬리게 했다.] 결국 마일스는 콜럼비아와 맺은 계약을 해지함과 동시에 [[워너 브라더스]]와 새로운 전속 계약을 체결했다. 마일스는 일렉트릭 베이스를 비롯한 여러 악기의 연주와 편곡, 컴퓨터 프로그래밍 등 다재다능한 재주를 갖고 있던 후배 [[마커스 밀러]]와 손을 잡고 '투투(Tutu)', '뮤직 프롬 시에스타(Music from Siesta)', '아만들라(Amandla)' 등의 앨범을 계속 발표했다. 이들 앨범에서 마일스는 뉴 트래디셔널 진영에서 계속 까던 펑크 성향을 아랑곳 없이 계속 밀고 나갔고, '뮤직 프롬 시에스타' 에서는 1960년대 길 에반스와 만든 '스케치스 오브 스페인'의 아이디어를 현대적인 발상으로 재 탄생시켰다. 팝 음악인들과의 협연이나 게스트 출연도 계속되었고, 영화 출연과 [[OST]] 제작도 병행해 '딩고(Dingo)' [* 훗날 배드 보이 버비나 열 척의 카누로 유명해지는 롤프 드 히어가 감독을 맡았다. 마일스의 유일한 (그리고 최후의) 대사가 있는 출연작이다.] 와 '더 핫 스팟(The Hot Spot)' 두 사운드트랙 앨범도 1990년에 발매되었다. 하지만 이미 마일스의 연주 인생은 끝나가는 분위기였고, 자신도 그것을 깨달았는지 1991년에는 계속 새로운 것을 추구하던 지금까지의 행보와는 전혀 다른, 과거의 자신을 되돌아보는 듯한 무대를 준비했다. 그리하여 그 해 7월, 마일스 데이비스는 [[스위스]]의 [[몽트뢰]]에서 열린 재즈 페스티벌 무대에 올라 [[퀸시 존스]]가 지휘하는 대규모 빅 밴드를 대동하고 '쿨의 탄생' 에서부터 '스케치스 오브 스페인'까지 자신과 길 에반스가 공동 작업한 곡들을 리바이벌했다. 이어 파리에서는 그 동안 함께 연주했던 여러 뮤지션들을 한 자리에 모아 195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30여 년 동안 발표된 자신의 대표 레퍼토리들을 연주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 두 공연 중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 연주 실황은 'Miles & Quincy Live at Montreux'이라는 앨범으로 발매되었다. 귀국한 뒤 당시 막 대중음악계의 주류를 휩쓸고 있던 [[힙합 음악|힙합]]과 재즈의 결합이라는 실험 정신을 다시 한 번 발휘했고, 이지 모 비를 비롯한 힙합 가수/DJ들과 공동 작업한 힙합 앨범 '두밥(Doo-Bop)'을 마지막 스튜디오 앨범으로 남겼다. 앨범 작업 후 8월 25일에 수척한 몸을 이끌고 [[로스앤젤레스]]의 할리우드 보울에서 웨인 쇼터가 지켜보는 가운데 무대에 올랐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건강 악화로 입원하게 되었다. 하지만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고, 뇌졸중과 [[폐렴]]이 재발하는 등 악재가 겹쳐 거의 한 달 동안 혼수 상태에 빠진 끝에 9월 28일 65세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은 10월 5일 뉴욕에서 엄수되었고 마일스의 가족, 친구, 지인 500명이 참석하여 그의 죽음을 애도했으며 유해는 브롱스의 우드론 묘지에 안장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